본문으로 바로가기

건강이야기

중년 여성에 공공의 적 ‘울화병’ (신경정신과 임원정 교수)
파일
  • 파일이 없습니다.
  • 등록일 2011-06-02

 

중년 여성에 공공의 적 ‘울화병’

임원정 | 이화여대 의대 신경정신과 교수

 

59세의 여성 환자가 내원했다. 환자는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고, 명치 끝에 뭐가 달린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가 명치 끝에서 목구멍 쪽으로 불덩어리가 올라와 참을 수 없이 힘들다고 했다. 유명하다는 내과에 가서 온갖 검사를 다 받았지만 별 이상이 없다고 하니 어이도 없고 답답하다면서 한숨을 쉬었다.

 

환자는 스무 살의 꽃다운 나이에 8남매의 장남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남편은 가족 중 유일하게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온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입장이었다. 반면 마흔이 갓 넘은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사사건건 간섭하기 일쑤였다. 그는 아무 내색도 하지 못했고, 어린 시동생과 시누이를 돌보느라 신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4년 후 서울로 온 뒤에는 장사를 하며 가계를 꾸려나갔지만 시동생과 시누이들이 서울로 올라와 이들을 공부시키고 결혼시키느라 막상 자신의 세 자녀에게는 제대로 신경도 쓰지 못했다고 한다.

 

작년에 환자의 막내아들이 결혼했는데 사건은 그때 터졌다. 자신이 그렇게 돌봐주었던 시동생과 시누이들은 조카의 결혼에 신경도 쓰지 않았고, 언제나처럼 여러 명의 시댁 형제들이 지속적으로 돈을 요구했다. 참을 수 없어 남편에게 말했지만 남편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난생처음 부부싸움을 한 후 남편은 한 달간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결국 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밥맛도 없고 힘도 없으면서 몸 여기저기가 아프기 시작했다. 많은 병원에 가봤지만 확실한 병명도 치료법도 알려주지 않고 증세는 더 악화되어 가기만 했다.

 

전형적인 화병(火病) 증상을 보이는 환자다. 한국 사람들이 흔히 ‘울화가 치민다’고 표현을 많이 하는데 오랫동안 참았던 울화, 분노 등이 쌓여 있다가 나이가 들고 정신적·신체적으로 약해져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을 때 폭발하면서 다양한 증상으로 표현되는 문화특이증후군이기도 하다.

 

임상에서 보면 환자의 90% 이상이 중년의 여성들로, 혹자는 ‘한국의 중년 아줌마 중에 화병 없는 사람도 있느냐’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육아 및 자녀교육은 주부가 챙겨야 하고, 자식이 잘못될 경우에도 엄마가 책임을 뒤집어쓴다는 피해의식이 만연해 있다. 오죽하면 “내가 죽더라도 남편과는 절대 합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거나 일흔이 넘은 나이에 황혼 이혼을 감행할까 싶다.

 

화병에 잘 걸리는 성격은 고지식하고 양심적이며 항상 감정을 억제하고 모든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다.

 

최근에는 직장 스트레스가 많거나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 남성에게도 자주 나타난다.

 

주요 증상은 얼굴 화끈거림이나 입마름, 가슴 두근거림, 답답함 등이 있다. 또한 목과 가슴에 덩어리가 느껴지거나 소화가 잘 안되고 두통과 어지럼증, 손발 저림이 동반되기도 한다. 불면증과 고혈압, 중풍, 당뇨병, 비만, 관절염 등 각종 성인병의 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 과민성 대장염, 만성 위염, 위궤양, 두통, 귀울림 등의 신경성질환과도 밀접하다. 또한 이러한 마음의 병은 신체적으로도 영향을 미쳐 심장 질환이나 위식도 역류 등의 증상이 동반될 가능성도 있다.

 

화병 치료는 소량의 우울증 치료제나 항불안제제 등의 약물치료와 정신치료로 나뉜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오랜 세월 억눌린 억울함, 분노, 화 등을 공통적으로 표현한다. 자신이 얼마나 오랜 세월 힘들게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로 도움이 되기도 한다.